어떤 여자가 공대생과 결혼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사랑으로 행복해 하시고, 사랑으로 아파하시는 게시물들을 보다가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자판을 열어 보았습니다. 잠시나마 제 글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고,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남편이 이 글을 보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약간의 거짓과 과장과 미화가 섞여있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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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저는 2010년 여름, 남편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 제가 계약직 직원으로 입사하게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저는 첫 눈에 남편에게 반하게 됩니다.


당시 제 이상형은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게임을 좋아해서 제 오덕오덕함을 이해하고 함께 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지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에서 제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저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은 모르겠지만 남편은 앞의 두 조건에서 아주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나 경제력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외모가요. 저희가 연애할 때 주변 언니들이 제일 많이 해준 얘기가 미녀와 야수같다는 거였습니다.)


남편은 와우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주말에는 고정공대를 다니고, 주중에는 길드 공대나 막공을 다니거나 주변 사람들이 게임하는 걸 도와주는 성실한 와우저였고 중고대학에서 전부 이공계분야 공부를 열심히 한 엘리트였습니다. 본인은 공부 열심히 안 했다곤 하지만 저같이 진짜 공부 안하고 오로지 덕력으로 쌓은 그림 실력으로 대학가고 취직한 사람에겐 동경의 대상이었지요. '와! 이 사람 너무 멋지다! 딱 내 이상형이야!'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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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편을 꼬시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의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로 정직하게 작업을 걸었습니다. 같이 와우하던 모든 사람들을 다 제치고 남편에게만 와우 버스를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그걸 핑계로 전화번호를 얻어냈고, 매일 밤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언제 들어오실 거에요?" 저희는 달라란에서 2인용 탈 것을 타며 유치한 사이버 데이트를 했고, 저는 초보 와우저 코스프레를 했습니다. "우와 둘이서 같이 탈 수도 있는 거에요? 우와 우와" 저는 와우=블앨 사제 금발 여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남편을 꼬시기 위해 타우렌 드루이드를 키웠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재수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저는 꽤 귀여운 아가씨였습니다. 스물 넷, 반짝이며 빛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먹만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에 나올데는 다 나온 데다가 하는 짓도 스타일도 귀여워 어딜 가도 곧잘 사랑받았습니다. 오덕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인 관광객들이 카와이하다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일본 사람이냐는 말이나 일본 만화에서 나온 것 같다는 말, 일본어를 잘 할 것 같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덕이지만 일본어를 못합니다. 히라가나도 못 읽습니다. 대신 후커나 아랄은 잘 씁니다.) 꼬시면 금방 꼬셔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왠걸요. 이 게임하고 물리하고 코딩 밖에 모르는 순둥이같은 남자는 저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신기한 여자다' 그리고 그 신기한 여자가 자신에게 작업을 거니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이 여자의 꿍꿍이는 뭐지?'  뭐긴 뭐야 너랑 연애하고 싶은거지...


평생을 이공계 학교 다니며 공부하고 IT개발만 해온 남편은 저처럼 화장하고 핑크색 하이힐신는 여자를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를 봤을 때 예쁘다, 귀엽다, 가 아니라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죠. 다른 이야기지만 제 친구 중에 스타일이 아주 좋은 섹시한 아가씨가 있는데, 남편은 아직도 이 친구가 무섭답니다. 화장때문에요. 길거리에서 헌팅도 많이 당하는 이쁜 친군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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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남편도 조금씩 저에게 호감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단둘이서 술 한 잔을 하기로 한거죠! 후후. 저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그냥 제 이상형에 잘 맞는 사람, 연애하고 싶지만 결혼은 잘 모르겠는 남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날 같이 술을 한 잔 하면서 저는 이 남자의 매력에 더 없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겨울, 따뜻한 사케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제가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얘기 해주세요." 머뭇거리던 이 남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1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세요?"


????


여러분은 아십니까? 저는 모릅니다. 이 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남자는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사람의 무게를 50으로 가정하고 중력 가속도가 어쩌고.."


저는 꽤 오랜 시간, 꽤 많은 수의 연애를 해본 연애 경험자였습니다만, 단 둘이 처음하는 술자리에서 사람이 10미터에서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남자는 처음 만나 봤습니다. 와...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남자 진짜 매력 터지는 사람이구나.'라고.


그리고 저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난 저는 그 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신나게 술을 퍼마셨고, 때문에 우리가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을 며칠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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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제가 여름~겨울 동안 힘들게 꼬신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를 많이 많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함께 하면서 남편은 저보다 먼저 퇴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요. (예비군이나 제사 등 이벤트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제가 잘 모른다고해서 무시하지 않았고, 제 의견을 경청해 주었고, 저에게 높임말을 써주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우주는 무인가 무한대인가? 지금까지 개발된 인공지능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어떤 것인가? 모바일 게임과 일반 온라인 게임 서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바와 c++ 개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등. 대신 저는 남편에게 다양한 게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스타/디아/와우 밖에 모르던 남편에게 문명을 알려주고, 콘솔게임을 소개해 주고, 유머게시판에 게임 유머가 올라왔을 때 '그건 던전앤파이터라는 게임이야'라고 알려주고, 티비에 광고하는 게임이 몬스터헌터인지 포켓몬스터인지 알려주었습니다.


저희는 누가 봐도 부러워 할 만큼 알콩달콩 연애했고, 2년 뒤에 결혼하여, 얼마 전에 남편과 똑같이 생긴 딸을 낳았습니다. 모두가 남편 얼굴 한 번, 딸 얼굴 한 번 보고 하하하 웃었습니다. 하하하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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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옛날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며 연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고 나에게 딱 맞는 내 짝이 있을 수 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 누군가를 꾸준히, 아니면 점점 더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하는 고민도 했는데, 4년 동안 남편과 만나고 생활하면서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남편이 지금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남편을 꼬시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남편은 말합니다. 제가 지금처럼 예쁘지 않았다면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저희는 둘 다 알고 있습니다. 시작이 어떠했든 지금은 서로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을.


왜 남편같이 멋지고 자상한 남자를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놔뒀을까요? 저는 종종 '내가 이 보석같은 남자를 발견해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 라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계신가요? 저는 그렇습니다. 참 행복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소중합니다. 여러분께도 제 행복한 마음과 기운이 조금쯤 전달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좋겠습니다. 모든 대숲러 여러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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